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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보이차 소개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by 우헤헤 대마왕 2010.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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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1
이래저래 우울한 을유(乙酉)년 세밑을 보냈다. 병술(丙戌)년 새해, 우리는 을유년의 첫날이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희망과 행복을 품고 한 해를 시작한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해마다 ‘새해의 소망’란에 빠지지 않는 항목이 바로 ‘건강’이라고 한다. 건강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영원한 숙제다.

지난해 건강에 관해 우리의 마음을 더없이 아프게 했던 일이라면 단연코 줄기세포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 쇼킹한 사건은 우리의 건강과도 직결되었던 문제이기에 그 공허함이 한층 컸다. 한편 젊은 층 사이에 불었던 ‘웰빙(Well-being)’ 열풍은 가히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무섭게 확산됐다. 그 열풍은 새해에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보이차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는 짱유화 교수(한서대)
웰빙 문화의 핵심은 물질적 가치에 매달리지 않고 정신과 신체의 조화를 통해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웰빙 문화 속에 다양한 건강기능성식품들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았다. 이에 그 동안 영양보충제의 대표적 상품이라 여겨왔던 비타민, 무기질제제 등 식이보충제들이 서서히 지고, ‘웰빙 건강 기능성식품’의 시대가 도래되었다.

웰빙 건강 기능성식품의 대표주자 중의 으뜸이 바로 차(茶)다. 차는 기호음료로서의 가치를 뛰어넘어 이젠 건강기능식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지난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10대 건강식품에 차가 포함되었던 것도 이러한 반증이다.

건강기능성식품의 공통점을 보면, 모두 강력한 항산화물질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다. 산화방지제로서 그동안 가장 각광을 받았던 것은 비타민이었다. 그러나 최근 산화방지제 연구의 관심사는 비타민에서 폴리페놀이란 물질로 옮겨가고 있다.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폴리페놀 추출물에는 산화에 의한 병폐를 막는 식물성 항산화물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비타민류와 비교해 볼 때 적게는 40배에서 많게는 100배 정도의 효과가 있다는 것도 밝혀졌다. 폴리페놀은 피를 맑게 하고 유해산소를 제거하는 기능이 탁월한 성분이다. 이러한 폴리페놀이 가장 많이 함유되어 있는 식품이 바로 차다. 그리고 차 중에서도 보이차 속에 가장 많이 함유되어있다.

21세기 중국에서 생산된 차 중에 가장 돋보인 차를 꼽는다면 단연 보이차이다. 보이차는 중국차의 명성을 높이고 위상을 고양시킴으로서 이젠 중국차의 또 다른 대명사로 굳어지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지금 중국 내에 보이차 전문판매상점은 무려 2만개 넘었다고 한다. 작년 한해 출간된 보이차 관련도서는 18권이며, 이는 차에 관련도서 부문에 37%를 차지하는 수치다. 그리고 보이차만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도 5개나 되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의 보이차에 대한 관심도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차의 장래가 그리 밝지 않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보이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중국 보이차를 보는 세계인의 시선은 보이차의 제작 방법에 대한 논란과 관계없이 이미 싸늘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보이차는 희극적인 소설과도 같다. 그래서 보이차를 가리켜 ‘수수께끼의 차’라고 한다. 누구나 보이차를 아는 것 같으면서도 도통 모르는 것이 또한 보이차다. 다시 말해 입문은 쉽지만 졸업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보이차 공부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연말특집호에서 2006년 세계의 화두(話頭)는 지식(knowledge)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최근 보이차 상품에서 발견된 흠결이 지식과 충돌하면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학문이란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오류를 줄이고 수정해 가는 과정이다. 이에 아무리 세계적인 학자의 연구 성과라도 완전무결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필자의 보이차 연구에 대한 결과도 완전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차에 관한 연재의 변을 단 것은 지식추구이라는 명제 아래 보이차의 베일을 벗김으로서, 독자들이 보이차에 대한 판단을 조금이라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쨩유화 교수는?

1955년 대만 生. 2005년 중국정부로부터 ‘보이차 세계 10대 권위자’로 선정되기도 한 보이차 전문가이다. 현재 한서대 차학과를 비롯해 중국 남경대, 절강수인대, 운남성 국립보이차연구원 등에서 연구 및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출처: 붓다뉴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2 :보이차의 역사



 
청나라 보이부의 유적지로 지금은 문창공이란 이름으로 정부로부터 보호 받고 있다. 현재 보이현에 남아있는 유일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보이차에 대한 혼란은 진실과 거짓의 갈등 속에서 그 본질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의 거짓말에 거짓말이 보태지는 이와전와(以訛傳訛)의 혼전 속에 보이차 문화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보이차 문화를 가리켜 ‘양두구육(羊頭狗肉)’ 즉 양머리를 대문 앞에 달아놓고 개고기를 파는 격의 ‘짝퉁문화’라고 비아냥거린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그리고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가 그 선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보이차’의 선택도 다를 바가 없다. 당신은 보이차에 대해 어떠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 그 정보는 어느 정도로 깊이가 있으며 근원적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당신이 보이차를 선택하고자 하는 방향을 결정한다.

아무리 많은 정보가 있어도 스스로가 지식을 활용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기억이란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준다. 그래서 올바른 정보의 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보이차의 진실 규명은 우리 모두의 의지가 하나가 돼야만 이루어질 수가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동안 떨어진 보이차의 신뢰를 얼마나 회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건전한 의도와 과학적 검증이 어우러져야만 보이차의 진정한 생명력을 부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보이차가 무엇인가를 알기에 앞서 그 이름의 유래와 의미라는 원초적 문제부터 풀어보는 것이 순서인듯 싶다. 중국 독음으로 ‘보이’를 ‘푸얼’이라고 부른다. 이에 ‘보이차’와 ‘푸얼차’는 같은 것으로, 모두 중국 운남(雲南)지역에서 만든 차의 이름을 일컫는다. ‘보이차’라는 이름은 명ㆍ청 시대 당시의 전남 곧 지금 운남 지역의 서쌍판납(西雙版納)과 사모지구(思茅地區) 특히 소위 6대 차산(六大茶山)에서 생산된 찻잎으로 당시의 행정소재지였던 ‘보이부’에서 가공ㆍ판매했기에 붙여진 것이다.

보이현 문창공

‘보이현’이란 지명은 청나라 옹정(雍正) 7년(1729)부터 연차적으로 보이부, 보이진을 거쳐 오늘날까지 약 2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이현의 정식 명칭은 ‘보이하니족이족자치현’이며 1985년 12월 15일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을 때 붙여진 이름을 오늘까지 사용하고 있다.

‘보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이곳 토착민인 하니족(哈尼族)의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보(普)’자는 성채의 뜻을 가진 ‘채(寨)’를 뜻하며, ‘이’자는 물굽이의 뜻을 지닌 ‘수만(水灣)’을 뜻한다. 이러한 토착민의 어원에서 비추어볼 때 ‘보이’라는 의미는 곧 물굽이가 있는 성채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의 물굽이는 란창강(瀾滄江)을 말한다. 란창강의 원류는 중국 티베트이며, 전체길이는 약 4,020㎞이다. 티베트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운남성을 거쳐 인도차이나반도로 흘러들어가 메콩강으로 변한다. 중국 영내에서는 1,800㎞만 흐르고 있다.

운남성의 행정구역 중 가장 넓은 지역이 사모(思茅)지역이다. 오늘날 보이현의 행정구역이 바로 이 사모시(思茅市)에 속해있다. 2005년 통계에 따르면 사모시의 차 재배면적이 약 102만 무(畝)에 이른다고 한다. 한 무를 200평으로 계산한다면 약 6만8천 헥타르라는 숫자가 나온다.(1 헥타르는 약 3,000평에 해당한다) 이 숫자는 한국의 전체 차 재배면적인 2천 5백 헥타르보다 무려 28배에 가까운 숫자다. 차의 전체 생산량은 3만 톤이며, 생산농가는 약 20만 가구이다. 여기에 종사하는 인력은 무려 106만 명에 달한다. 사모시의 전체 인구가 250만인 것을 보면 2.5명 중 한 명이 차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모시의 10개 현(縣) 중 보이현의 차 재배면적은 6만1천 무, 즉 4천 헥타르이고, 차 생산량은 1천2백 톤 정도에 불과하다. 사모시 전체 차 생산량 1/30 밖에 되지 않는 보이현이 이제 보이차의 산업에서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기에는 너무 미약하다는 것이 시정부의 판단이다. 그래서 사모시의 미래 운명을 좌우하는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이 안건은 현재 중국 중앙정부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다. 내용인 즉 사모시(思茅市)의 명칭을 보이시로 바꾸는 작업이다.

자료에 따르면 ‘보이시’로 개명되면 그 경제 시너지 효과는 무려 1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어느덧 보이차의 위력은 마시는 ‘차’라는 단순경제에서 벗어나 문화ㆍ관광ㆍ건설 등 산업인프라를 구축해나가는데 있어 동력의 핵심으로 부상되고 있는 것이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3 :보이차의 명성

보이차는 지금 ‘세계호’의 깃발을 달고 쾌속으로 항진하고 있다. 보이차를 한번쯤 접해본 사람이면 너나할 것 없이 보이차에 대해 ‘한 말씀’ 할 정도로 보이차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바로 ‘보이차 브랜드의 형성’이다.

 

19세기 지식인 이규경(1788~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도차변증설>에서는 보이차의 인기에 대해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항간에서는 “보이차, 별 불일 없는 차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가난한 변방소수민족들이 마시던 조잡한 차를 홍콩, 타이완 장사꾼들이 유행하게 만든 것이 보이차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시류에 따라 상인들의 ‘띄우기 작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20세기 상업주의에 의해 탄생된 최고의 걸작품이 바로 ‘보이차’라는 것이다.

상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학자의 연구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학자의 선행연구 성과를 통해 상품의 시장 활성을 이끌어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에서 이미 유통되고 있는 상품을 후속작업을 통해 연구하는 것이다. 보이차 연구는 후자에 속한다. 뒤늦게 출발한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차의 팽창속도에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주소이다. 그러는 동안 보이차 시장은 너무 커버렸고, 결국 학자들의 연구는 항상 뒷북치는 결과만 낳게 되었다. 물론 필자의 연구도 그 중의 하나다.

‘묵힘’이라는 것은 시간적 흐름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는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다. 그럼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처럼 보이차는 진정 별 불일 없는 차인가? 역사적으로 중국 상류층으로부터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던가? 이 질문에 대한 지금의 필자의 답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지금의 답’이라는 의미는 몇 개월 전만해도 필자의 답이 ‘그렇다’라는 오류를 범했다는 얘기이자, 그러한 잘못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다.

필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보이차는 적어도 청나라 초기부터 중국 집권층, 상류층들이 마셨던 차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기록이 발견된 최초의 글은 한국의 문헌에서 비롯되었다. 조선과 청나라간의 정치ㆍ외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기록문학인 <연행록(燕行錄)>이 그것이다. 연경(燕京)은 북경 즉 지금의 베이징을 말하며 청나라 때의 이름이다.

고려 때부터 외교 사신들의 임무수행 이외 많은 식자들이 사행(私行)으로 중국에 건너가 외국의 제도나 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기록은 현재 알려진 것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다. 사행에 참가하여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당대의 지배층 식자들로서 그들이 만나고 보았던 연경의 실상은 청나라의 지배계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에 그들의 기록은 곧 청나라당시의 풍속도이자 현실문화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연경에는 보이차가 있었다. <연원직지(燕轅直指)>와 <계산기정>에서 모두 보이차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보다 상세하게 소개한 것이 <연원직지>다. “차의 품목의 수는 다양하다. 그들은 황차(黃茶)와 청차(靑茶)를 항시 이용하며, 그 다음은 향편차(香片茶)이다.

그러나 가장 진귀하게 여긴 것이 보이차다. 다만 가짜가 많다는 것이다”라는 기술은 당시의 수도인 연경에서도 ‘짝퉁’ 보이차가 등장할 만큼 수요층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당시 권력 지식층의 기록한 한문으로 쓴 연행기 이외 여성 및 일반 독자를 의식하여 별도로 쓴 국문본인 <병인연행가(丙寅燕行歌)>와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서도 보이차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19세기 지식인 이규경(1788~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도차변증설’에서는 보이차의 인기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 연도(燕都)에서는 차의 품목이 많고 성행하는데, 이 중 보이차가 제일이요, 백호차(白毫茶)가 둘째, 청차가 셋째, 황차가 넷째다”라고 했다. 특히 오늘날 ‘고증학의 총화’로 평가받고 있는 이규경의 고증은 당시의 보이차가 진귀함과 더불어 인기의 척도를 가늠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청나라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실에서도 보이차를 마셨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청의 건륭황제는 보이차에 대해 “오직 보이차만이 묵직하고 품위가 있다 … 육우도 응당 서투름과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라고 하였고, 조선 정조의 둘째 사위이기도 한 홍현주(洪顯周)는 “대나무 차통에서 고운 흰 비단을 풀어보니 둥근 달과 같은 보이차가 보인다” 등의 시구(詩句)를 남겼다. 이러한 기록들은 보이차가 21세기뿐만 아니라 17세기 청나라 때부터 이미 중국의 최고명차로써 권력의 중심에 서있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있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4 :보이차의 종류

“이곳의 사대부 그리고 백성들이 마시는 차는 찻잎을 찐 후 덩어리 모양을 만든다. 그들은 이를 보차(普茶)라고 부른다.”

명나라 사람 사조제의 <전략>에 기록된 글이다. 이 글은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글로 보일 수 있지만, 필자의 눈에는 수많은 보이차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가 담겨져 있는 글로 보인다.

첫째, 여기서 말한 ‘보차(普茶)’는 보이차를 말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보이차에 관한 사료(史料)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둘째, ‘전’이라는 곳은 지금의 운남(雲南)을 가리킨다. 즉 보이차의 원산지는 운남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셋째, 차의 모양은 줄기 형태가 아닌 덩어리 상태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명나라 만력(萬曆, 1573~1620)년간에 기록된 것으로,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당시에도 지금처럼 찻잎을 우려 마시는 것이 일반적인데도 불구하고 운남 지역에서는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덩어리 형태의 차를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보이차의 총애는 청나라 들어오면서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공으로 바치는 공차(貢茶)의 가지 수는 무려 여덟 가지다. 물론 모양도 다르고 무게도 달랐다. 이중 가장 큰 것은 마치 사람의 머리모양과 같은 것으로 무게는 자그마치 다섯 근이다. 이를 ‘인두공차(人頭貢茶)’라고 한다. 지금도 금과공차(金瓜貢茶)가 하나 남아있어 항주의 중국농업과학원차엽연구소(中國農業科學院茶葉硏究所)에서 소장하고 있다.

청나라부터 흥하기 시작한 보이차의 인기는 청나라와 함께 스러져갔으니 이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보이차가 공차로 지정된 것은 1729년 옹정(雍正) 10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정권말기에 도달하자 혼란과 소요로 인하여 공차는 방화와 약탈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에 조정도 어쩔 수 없이 1908년 광서(光緖) 30년 때 공납을 폐지시켰으며, 200년 동안 궁중의 영욕과 함께 했던 보이공차는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진다.

조공으로 바쳤던 공차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의 사업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운남에서 보이차를 운영하는 상점들이 상당했다. 대부분 이무(易武)라는 곳에 모였다. 가게에 따라 취급하는 품목의 질도 각자 달랐다. 대체로 품질 좋은 것은 해외로 갔고, 질이 낮은 것은 티베트, 몽골, 위구르 등 빈민지역에 팔았다.

차라는 것은 원래 잎으로 만든 줄기형태인데, 운반할 때 부피가 크고 쉽게 끓어지는 단점도 지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안된 방법이 바로 찻잎을 압착하여 긴압차(緊壓茶)로 만드는 것이다.

보이긴압차 중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둥근 형태의 원차(圓茶)이다. 원차의 무게는 357g이다. 예로부터 일곱 편을 묶어 죽순껍질로 포장하는 것이 전통방법이다. 조정으로 보낸 공차는 말할 나위 없이 가장 좋은 찻잎을 원료로 삼는다. 좋은 찻잎이란 봄에 딴 여린 찻잎 춘첨(春尖)을 말한다. 그러나 민간의 상품은 그러한 고급 찻잎만을 쓸 수가 없다.

이에 민간 보이차는 대부분 가공할 때 비율에 따라 찻잎을 혼합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혼합 찻잎의 등급은 1, 3, 5, 7, 8, 9의 6등급으로 나뉘는데, 대체로 보이차 겉 표면에는 20%정도의 3등급 찻잎을 쓴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7등급 20%, 8등급 30%, 9등급 40%의 비율로 채운다. 물론 좋은 등급의 찻잎은 잎차 형태 즉 산차(散茶)로 10등급으로 나눠 비싸게 내다판다.

둥근 형태의 원차는 70년대 접어들어 이름을 ‘칠자병차(七子餠茶)’로 고쳐져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또 다른 형태의 보이차가 보이는데, 사발처럼 생긴 타차, 심장모양처럼 닮은 긴차(緊茶) 그리고 네모난 모양 중 벽돌처럼 생긴 전차와 정사방형의 방차(方茶)가 있다.

가장 오랜 정통을 지니는 차는 병차와 방차이다. 특히 방차는 공차로서 청대부터 ‘복록수희(福祿壽禧)’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어 ‘사희방차(四喜方茶)’라고도 불린다.

예로부터 티베트로 공급하는 차는 심장처럼 만든 긴차였다. 모양이 버섯처럼 생겼다하여 ‘마고두’라고도 한다. 1967년 보다 효율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모양을 벽돌처럼 바꾼 것이 전차에 관한 유래이다. 긴차는 1986년 당시의 반선(班禪)라마의 요청으로 다시 만들어져 오늘날 시장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그릇처럼 생긴 타차는 1902년 운남 하관(下關)의 차상들이 둥근 형태의 ‘구냥단병차(姑娘團餠茶)’라는 작고 둥근 보이차를 그릇의 모양으로 개조하여 만든 것이 유래다. 타차는 지금 사천(四川), 중경(重慶) 지역에서도 만든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5 :보이차의 수송길-다마고도(茶馬古道)

중국인들은 흔히 길을 가리켜 ‘마로(馬路)’ 즉 말이 다니는 길이라고 한다. 하긴 옛날 교통수단은 모두 말로 이루어졌으니 그러한 단어도 나올 법도 하다. 보이차의 운송도 이러한 ‘말길’을 이용해 이루어졌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보이차의 운송길이 보이차가 뜨자 덩달아 유명세를 타고 있다.

  15년 전 운남대학 무치홍(木霽弘) 교수 일행은 최초로 이 길을 답사했다. 아니 차라리 탐험이라 말해야 옳은 듯싶다. 그들이 답사한 길은 운남에서 출발해 티베트까지 가는 산길이었는데, 너무나 장엄할 뿐만 아니라 극도로 험악하기도 했다. 어느 산길은 목숨을 내놓아야 비로소 지나갈 수 있는 길도 있다고 한다.

이름조차 없던 이 길이 무치홍 교수에 의해 ‘다마고도(茶馬古道)’라 명명됐고, 불과 15년이란 짧은 세월 사이에 이젠 다마고도를 모르고선 차를 안다고 행세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명해진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보이차 운송 길 즉 다마고도는 6개가 있다고 한다. 이 길들은 대부분 청나라 때 보이차 상점들이 즐비한 이무(易武)에서 출발해 곤명(昆明)을 거쳐 북경으로 간다. 보이차를 조공하는 길을 가리켜 ‘보이관마대도(普이官馬大道)’라고 한다. 작년 필자와 중국운남공산당청년단은 120필의 말에 보이차를 가득 실어 이 길을 8개월간 걸어 북경에 도착했다. 실로 166년 만에 재현한 조공의 길이자 처음 시도했던 프로젝트였다.

다마고도 중 가장 험한 길은 역시 티베트로 가는 길이다. 이 길 역시 이무에서 출발해 하관(下關)과 샹그리라(香格里拉)를 거쳐 티베트에 도착하는데, ‘보이관장다마대도(普이關藏茶馬大道)’라고 한다. 보이병차의 무게가 왜 편당이 357g이고, 왜 한 통이 7개여야 하며 왜 12통을 한 대바구니에 담아야 하는지의 의문은 모두 여기서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

티베트로 가는 보이차 운송 말은 사실 대부분 당나귀와 노새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말보다 몸집은 작지만 체질이 강하고 거친 먹이를 잘 먹으며, 지구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말, 당나귀, 노새(이하 말로 지칭함)가 하루 걸 수 있는 길이 60km라고 한다. 이에 대부분 60km마다 하나의 마역(馬驛)이 있다고 한다. 말 한 필이 부담할 수 있는 화물의 무게는 60kg이다. 즉 60kg의 화물을 지녀야 비로소 하루 60km를 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조건들을 모두 헤아려 만들어진 것이 보이차의 무게 즉 357g이다. 357g×7편이면 한 통이 2.5kg이 된다. 2.5kg씩 12통이면 한 대광주리가 되는데, 이것이 30kg으로 말의 양쪽에 대광주리 각각 하나씩을 실으면 정확히 60kg이 된다. 이것이 보이차의 무게가 왜 357g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예로부터 보이차는 대부분 동남아로 수출됐다. 운남의 접경나라인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이 주 대상국이었다. 보이차는 이 나라들을 거쳐 태국, 홍콩, 마카오까지 이르렀다.

작년 ‘다마고도 북경조공 만리길’의 성공은 많은 상인들에게 부를 안겨주었다. 참여의 동기는 순수했으나 결국 돈은 상인들이 벌었다. 이러한 결과는 다마고도를 통해 보이차의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상인들에게 심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더 없이 좋은 돈벌이를 놓칠 리 없을 상인들이 흥행만 된다면 어느 길이든 어느 곳이든 보이차를 말에 실고 ‘다마고도의 재현’이라는 명분을 달고 상혼을 발휘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금년만 해도 운남에서 3개의 각기 다른 다마고도의 재현이 이뤄질 예정이라고 한다. 흥행만 된다면 이벤트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티베트를 거쳐 이탈리아의 로마로, 복건(福建)에서 바다 건너 타이완으로 그리고 북경과 북한을 건너 한국으로 온다는 계획도 있다고 한다. ‘다마수도(茶馬水道)’라는 명칭도 이제 멀지 않아 생길 것 같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6 :보이차 속의 골동 보이차

보이차의 흥망은 청나라 왕조의 성쇠에 따라 운명을 같이했다. 조선의 문고(文藁)에서도 보이듯 보이차의 명성이 가장 조명을 받은 때는 청나라 중기부터 후기까지였다.

만주족이 지배했던 청나라가 1911년에 망하자,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새로이 구성된 한족의 나라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40년간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 내전으로 인해 극심한 피폐에 시달린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변방에서 생산된 보이차가 중앙에 공급되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되었고, 결국 보이차는 중앙지배계층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것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보이차’란 이름조차 모르고 지내야 했던 역사적 배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운남 현지의 보이차 생산은 위축되지 않았다. 비록 중앙에서의 시장은 잃었으나 광활한 티베트, 위구르, 몽골 등 서역(西域)의 소수민족들이 주 소비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광대한 서역시장의 수요는 보이차의 생명력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었고, 보이차를 취급하는 상점 또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상인들은 보이차를 두 가지 품질로 나누어 만드는데, 서역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것은 하등급 찻잎으로 만든 긴차(緊茶) 혹은 병차(餠茶)였으며 수유차의 원료로 쓰였다. 고급 찻잎으로 잘 만들어진 산차(散茶)와 원차(圓茶)는 주로 해외시장으로 나갔다.

당시 운남성 보이차의 찻잎은 오늘과는 달리 모두 야생종이었으며, 차나무는 교목(喬木) 혹은 반교목(半喬木)이었다. 당시의 보이차는 찻잎을 덖어 숨을 죽여 비빈 후 햇볕으로 말린 방법 즉 전통가공법으로 만들었다. 또한 야생 찻잎은 일반 찻잎과는 달리 카테킨의 함량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아미노산, 당류 등의 성분이 상대적으로 높기에 카테킨의 떫은맛을 상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달리 보이차를 생차(生茶)로도 마실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때의 원료가 야생 찻잎이었기 때문이다.

보이차의 생명력은 생차뿐만 아니라 묵힘으로써도 나타난다는데 그 매력이 있다. 이러한 장점은 보이차를 저장 가능케 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었고, 생차와 묵은 차등 두 가지 형태로 상품화하게 된다. 보이차는 묵을수록 생기는 독특한 맛이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자 차상점들은 순환판매(循環販賣)방식을 택하여 매년 새로 만든 보이차는 창고에 저장해두고 묵은 보이차를 연도에 따라 값을 매겨 거래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했다. 물론 운송 또는 보관해야하는 차는 증기 압력을 주어 덩어리로 만들어 통풍이 잘되고 서늘한 창고에 저장하였다.

당시 보이차를 취급하는 상점의 집합지는 이무(易武)였다. 이무는 소위 찻잎이 좋다는 6대차산(六大茶山)에 있었고, 유락(攸樂), 혁등(革登), 의방(倚邦), 망지(莽枝), 만단, 만철(曼撤) 등 6대차산을 가리켜 통상 ‘이무차구(易武茶區)’라고도 부른다. 대표적인 차 상점인 복원창(福元昌), 동경호(同慶號), 경창호(敬昌號), 동창호(同昌號), 송빙호(宋聘號) 등이 모두 이곳에 가게를 열어 부를 쌓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생한 돌림병(瘟疫)은 보이차의 상업근간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무에서 발생한 돌림병의 파장은 운송수단인 마방(馬幇)까지 미치게 됐는데, 각지의 마부들이 전염병이 두려워 이곳 출입을 거부하는 사태는 이무 차산업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에 과거에 아주 빈번하게 왕래했던 마방들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보이차 상점들도 잇달아 휴업하게 된다.

공산중국의 등장은 개인 상점마저 허용하지 않는 정책 아래 이무의 보이차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해 그 화려했던 영화(榮華)를 접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산물이라 여긴 옛 보이차는 문화대혁명 때 모두 불태워졌고, 그 나마 지구상에 남아 있는 것은 모두 50여 년 전 다마고도(茶馬古道)를 통해 동남아를 거쳐 홍콩 상인들 손에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희소가치가 있거나 유서 깊은 기물(器物) 또는 서화(書畵) 등의 미술품을 가리켜 골동품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골동품이라 불리는 ‘골동보이차’. 한 편 먹을 때마다 가치가 배로 뛰어 어느덧 호가(呼價)는 있어도 거래가 없는 골동 중의 골동으로 보이차 마니아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7 :보이차 속의 인자 보니차

보이차가 오늘날까지 신드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인자보이차의 공이 절대적이다. ‘인자(印字)’란 보이차 겉 포장지에 글자를 인쇄했다는 뜻이다.


사실 앞서 출하됐던 골동보이차에는 포장지 자체가 없었다.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진 골동보이차는 보이원차라고도 하는데, 한 편의 중량은 7량 곧 지금의 357g이었으며, 7편을 한 죽통에 담았다. 대체로 찻잎을 증기로 가공할 때 차상점들이 자신들의 상호와 제품에 관한 내용을 작은 종이에 새겨 찻잎과 함께 압제하였으며, 이러한 종이를 가리켜 ‘내비(內飛)’라고 한다. 

제품포장을 보면 죽통으로 싼 7편의 푸얼원차에는 포장지가 없었고, 다만 7편의 푸얼원차를 죽순으로 마무리 포장할 때 상호를 가리키는 도안 및 문구를 인쇄한 큰 종이 곧 ‘내표(內票)’를 7편 중 최상단의 원차 위에 깔아 출하한 것이 이들 개인 차상점들의 공통된 포장법이다.


내비와 내표는 모두 차상점의 선전물로 사용됐으며 때로는 차의 진위를 살피는 징표로 이용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만약 당시 보이차에 이러한 내비와 내표 마저 없었다면 보이차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근거 없는 제품은 생명력이 결여되기 마련이며, 자생력 없는 상품은 소비자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보이차가 겉 포장지로 쌓이기 시작한 것은 1952년 때부터이며, 중국이 공산화된 후 3년만의 일이다.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 대신에 재산의 공유를 실현시킴으로써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중국공산당정부의 이상이자 신념이다. 그 일환으로 차를 관장하는 각 지방의 국영회사의 이름을 바꾸는 동시에 중국차를 대표할 수 있는 심벌마크를 정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보이차를 관장하는 회사는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로 개명되었고, 이듬해인 1951년 조승후(趙承煦)라는 사람이 설계한 도안인 ‘팔중차(八中茶)’가 중국 내의 모든 차상품의 공식로고로 등재된다. 상표 등록된 이 도안은 8개의 붉은 ‘중(中)’자로 둥글 원을 만들고 그 중앙에 녹색 ‘차(茶)’자를 새긴 마크로 되어있다. 여기서의 ‘중’자는 중국을 말하고, ‘팔(八)’이란 발(發)의 음을 빌려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색상에 있어 ‘중’자를 붉은 색으로 택한 것은 공산당의 상징적 빛깔과 길상(吉祥)이라는 뜻을 내포되어 있고, ‘차’자를 녹색으로 쓴 것은 찻잎의 원색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팔중차’ 로고가 탄생된 후 보이차는 모두 개별 포장되어 출하됐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개인 차상점 곧 무포장지 보이차 제품의 근거지가 이무(易武)였다면 공산화 이후 국영업체의 포장지 있는 보이차 제품의 중심지는 맹해였다는 점이다. 중국의 공산화는 보이차에 있어 포장지의 유무를 가늠케 하는 하나의 기점이 된 것이다.


인자를 대표하는 보이차로는 홍인(紅印), 녹인(綠印), 황인(黃印) 등 제품이 있으나, 대체로 홍인과 녹인을 주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명칭은 출시 때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니고 후일 시장상인들에 의해 붙여진 상품이름이다. 그냥 보이원차로 출하됐던 차를 어째서 색깔로 새로이 분류되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일까? 그 연유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쇄상의 오류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50년대 초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생산되었던 인자급 보이차의 포장지에는 사실 2가지 색상밖에 없다. 팔중차 로고 중 ‘차(茶)’자만 녹색으로 될 뿐 남은 글자는 모두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에 출하된 보이원차 상품에서 ‘차’자를 비롯해 포장지 전체를 붉은 색으로 인쇄했던 것은 당시의 낙후된 인쇄기술과 작업자의 나태한 자세에서 비롯된 합작물이다.


이러한 잘못된 포장지의 인쇄는 몇 년 동안 지속되었고, 이때의 상품을 후일 ‘홍인’이라 명하게 된다. 이후 포장지의 ‘차’자를 원안대로 녹색으로 인쇄하게 되는데, 이 제품을 ‘녹인’이라 불렀고, 이어 잉크 배합비율의 실수로 인해 ‘차’자가 노란색을 띈 것을‘황인’이라 했다. 그리고 홍콩의 상인들이 붙인 ‘녹인’이라는 이름이 타이완 사람에게 건너가‘남인(藍印)’으로 불리어 또 한 차례 변신하게 된다.


홍인과 녹인의 차맛은 다르다. 또한 인자급이라도 인쇄지와 글씨체에 따라 여러 가지의 맛이 배어난다. 이는 찻잎은 농작물이기에 해마다 품질이 같을 수가 없고 찻잎의 원료와 배합비율에서 생긴 차이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8 :보이차 속이 광운공병

누군가 철관음(鐵觀音)이 부드러운 새색시 같다면 보이차는 강력한 남성을 상징한다고 비유한 적이 있다. 바로 이러한 강인하고 중후한 보이차 맛이 세계 차인들의 혀를 단숨에 사로잡아 어느덧 보이차는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차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어찌 보면 보이차가 근세기에 들어와 이렇게 웅비(雄飛)할 수 있는 것은 홍콩, 마카오, 타이완 등지의 상인들이 그 중심자리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특별한 맛’을 상징하는 보이차를 더 매혹적이고 화려해 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상술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중국 내의 보이차 소비시장은 티베트, 몽고, 위구르 등 서부소수민족지역이었으며, 해외의 주요시장은 홍콩과 마카오였다. 영국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홍콩과 마카오는 자유무역과 항만기능을 이용하여 세계의 물류중심지로 각광을 받은 것은 50년대의 일이었다. 당시 이곳은 수많은 보세창고가 있었으며 여기에 필요한 하역 인부의 수는 상당했다. 이들이 해갈용으로 마시는 차는 대부분 부담 없이 주전자에 끓여 마실 수 있는 값싼 육보차(六堡茶)와 보이차였다.

공산중국 초기의 차 수출에 관한 업무는 주로 상해시와 복건성의 하문(厦門) 그리고 광동성의 광주(廣州)의 수출입공사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운남에는 세관의 검사를 거친 수출입화물에 대해 관세를 납부하고 면장을 발급받는 통관허가증이 없어 보이차에 관한 수출은 모두 중국광동성차엽진출구공사(中國廣東省茶葉進出口公司)에서 도맡아 대행해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소위 인자보이차의 수출은 대부분 이 경로를 통해 홍콩과 마카오로 갔다.

광동에 있는 차엽진출구공사는 운남보이차에 관한 수출 건만 담당할 뿐만 아니라 운남에서 보이차 원료를 공급받아 자체적으로 이윤을 창출하기도 했다. 이 기관은 수출통관을 무기로 삼아 운남에 보이차 원료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운남에서는 부득이 매년 수 백톤의 보이모차(1차 가공된 반제품 잎차)를 이곳에 공급하게 되는데, 이러한 조달관계는 1973년 운남 자체에서 자영(自營)으로 수출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광동지역은 예로부터 자체적으로 차를 만들었다. 물론 주 판매지역은 홍콩과 마카오였다. 그들은 광동의 찻잎, 심지어 월남의 찻잎(越南靑)을 가져와 차를 만들었으나 반응이 좋지 않자, 운남 찻잎(雲南靑)의 가치를 최대한 이용하여 잎차인 산차(散茶) 그리고 보이원차와 같은 병차(餠茶)를 만들어 홍콩 등지에 팔았다. 시장에서 이 병차를 가리켜 광동병(廣東餠)이라 한다.

광동병의 내비(內飛)는 인자보이차의 ‘팔중차(八中茶)’를 본떴으나 포장지 없이 7편을 쌓은 형식은 골동보이차와 같다. 죽순껍질로 포장하여 홍콩 등지에 팔았는데, 반응은 꽤 괜찮았다고 한다. 금속틀로 압제해 운남의 것 보다 단단했으나, 운남 찻잎을 이용했다는 것으로 일정한 고객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물론 운남이 아닌 광동에서 만들어진 제품이었기에 운남보이차보다는 몇 갑절 싸게 유통되었다.

오늘날 시장에서 연도 있는 보이차 중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차가 바로 이 ‘광동병’이다. 광동병은 1990년대에 들어와 상인들의 각색으로 ‘광운공병’이라는 이름으로 환골탈퇴하게 된다. ‘광(廣)’은 광동지역에 만들었다는 뜻, 운(雲)은 원료가 운남의 것, 공병(貢餠)은 조공으로 바칠 만큼 질이 좋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용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광운공병의 ‘짝퉁’이 많다는 것이다. 짝퉁 보이차란 아래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에만 해당되면 성립된다. 하나는 보이차의 상표 또는 제작연도를 속이는 것, 다른 하나는 보이차의 산지원료를 속이는 것. 여기서의 ‘보이차 원료’란 운남지역에서 생산된 찻잎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운남 이외의 지역에서 난 찻잎은 보이차의 모양을 흉낼 수 있어도 보이차의 진미(眞味)를 재현할 수 없기에 짝퉁이라 부른다.

지금 시중의 짝퉁 보이차는 ‘광운공병’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1973년, 운남에서 자체적으로 수출업무의 기능이 생기자 광동이란 지역적 이용가치가 떨어져 보이차의 원료공급을 중단시켰다. 이에 73년 이후 만든 모든 ‘광운공병’의 원료는 운남의 것이 아니기에 전부 짝퉁으로 분류된다. 만약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보이차는 어느 지역의 찻잎으로 만들어졌는가?운남인가 아니면 광동 또는 동남아의 찻잎인가. 그 판단의 가름선이 바로 1973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9 :보이차 속의 칠자병차 1

칠자병차의 유래는 골동보이차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운송수단인 마필이 하중을 견딜 수 있는 60kg의 무게와 수송 길이었던 다마고도(茶馬古道)의 통행여건에 의해 둥근 보이차의 무게는 357g로 정해졌다. 이때 보이차의 총칭은 보이원차(普洱圓茶)라 했으며, 개별 상점에서 만든 보이차는 모두 자신들의 상호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다.

오늘날 병차(餠茶)와 원차(圓茶)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서로 다른 재질의 보이차로 존재했다. 당시 상인들은 보이차의 품질을 두 가지로 나눠 만들었는데, 고급 찻잎으로 잘 만들어진 둥근 차를 ‘원차’라 하여 주로 해외시장에 판매한 반면 하등급 찻잎으로 만든 것은 ‘병차’라 하여 판매대상은 주로 서역지역이었다. 즉 둥근 모양은 같으나 원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 것이다.

 

공산중국 치하 아래 처음 만든 둥근 보이차 곧 인자보이차의 포장지를 보면 ‘중차패원차(中茶牌圓茶)’라는 글귀가 있다. 글자에서 알 수 있듯 고급 찻잎으로 만들었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 원차이다.

지금 우리가 시중에서 접하고 있는 둥근 형태의 보이차는 대부분 칠자병자다. 칠자병차는 보이원차의 전통 포장법과 같이 7편을 한 죽통에 담았다. 칠자병차의 이름에 대해 예로부터 여러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운남의 민족문헌에 따르면 ‘칠자(七子)’란 ‘다복다손(多福多孫)’의 의미며, ‘병차(餠茶)’는 둥근 모양의 보이차를 가리킨다고 적혀있다.

‘칠자병차’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쇄물로서 등장하게 된 해는 1973년부터다. 이는 문화대혁명 때인 1972년에 그동안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라 불렸던 회사의 이름을 ‘중국토산축산진출구공사운남성차엽분공사(中國土産畜産進出口公司雲南省茶葉分公司)’로 개명한 후 비로소 포장지의 인쇄물에 ‘칠자병차(七子餠茶)’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흔히 보이차의 시대적 흐름을 고대와 현대로 나누는데, 그 가름의 잣대가 바로 1973년이다. 1973년은 보이차의 역사에 있어 한 획을 그었던 해다. 회사 이름을 바꾼 것을 비롯해 자체적 수출업무기능의 실현 그리고 미생물발효의 탄생 등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이 해부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대보이차와 현대보이차의 차이는 발효에서 나타난다. 고대보이차의 발효는 자연산화에서 비롯된 것이며 현대보이차의 발효는 미생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다르다. 고대보이차는 다시 골동보이차 즉 호자급(號字級)보이차와 인자급(印字級)보이차로 나뉘지만 모두 자연발효에서 진화(陳化)된 상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골동보이차를 제1세대, 인자보이차를 제2세대 그리고 현대보이차 즉 1973년 이후의 보이차를 제3세대 보이차라 부른다.

제1세대 보이차는 이무(易武)의 개인상점에서 만들어졌던 반면 제2세대와 제3세대 보이차는 모두 국영 맹해차창을 중심으로 생산된 제품이다. 그리고 지금 보이차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신제품들을 가리켜 제4세대 보이차라 부르고 있다.

제3세대 보이차 즉 현대보이차의 또 다른 이름은 숫자급보이차라고 한다. 시장에서 이를 ‘숫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호자급과 인자급의 명칭에 관한 흐름을 일관성 있게 맞추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미생물발효의 탄생을 기점으로 보이차 출하공장을 곤명공장(昆明)은 1번, 맹해공장은 2번, 하관공장(下關)은 3번이라고 지정하여 제품을 관리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10 :보이차 속의 칠자병차 2

제3세대보이차, 현대보이차 또는 숫자보이차라고도 일컬어지는 칠자병차의 탄생은 미생물발효공법에서 비롯되었다. 미생물발효공법을 인공발효 또는 쾌속발효라고도 부른다.

1973년 미생물을 통해 쾌속발효시킨 미생물발효보이차의 등장은 보이차의 기존 생산방식뿐만 아니라 유통시장 질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인위적인 고온다습한 공간을 통해 배양한 미생물의 작용은 찻잎의 산화를 가속화시켰으며 이러한 공법을 가리켜 학계에서는 ‘후발효작용(後醱酵作用), Post-fermentation’ 또는 ‘악퇴변색(渥堆變色), Pile-fermentation’이라 부르기도 했다.

 미생물발효보이차에 대해 중국정부 당국이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1979년 운남성 정부가 발표한 ‘운남성보이차제조공법시행규칙’에 관한 시행령이다. 

“보이차란 운남성의 대엽종 찻잎으로 만든 녹차긴압차(綠茶緊壓茶)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찻속에 함유되어 있는 여러 효소 성분들, 특히 폴리페놀 중심으로 자연발효 되어 차색이 변하는 동시에 색다른 맛과 향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차의 변화는 오래 묵힐수록 그 향미를 더욱 느낄 수 있는 것이 보이차의 진가다. 보이차의 자연발효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폐쇄적이고 낙후된 운남성의 교통망에 의한 장기간의 운송기간에서 온 발효였다.

오늘날은 운남성의 교통이 발달되어 1년이 소요됐던 운송을 단 며칠 혹은 몇 시간 안에 이룰 수 있게 됐다. 이에 지난날 운송수단에서 비롯된 자연발효의 맛과 향을 재현하기 위해 우리는 ‘보이차쾌속발효가공법’을 개발하여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하고자 한다. 쾌속발효가공법이란 물과 습도에 의해 인위적으로 발효한 가공법으로서 1975년 곤명차창(昆明茶廠)에서 생산한 후 점차적으로 맹해, 하관(下關), 보이차창 등으로 확산되었다. 그동안의 가공법에 나타난 여러 난제들을 완벽하게 극복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이 얻어 이제 운남 각 지역의 차공장에서도 보이차를 생산하고 있는 실태이다. 이에 운남성정부는 보이차 품질의 제고를 보다 유효하게 관리하기 위해 아래 같은 시행령을 반포한다.” 

이것이 ‘운남성보이차제조공법시행규칙’에 관한 시행령의 모두(冒頭) 내용이다. 모두 내용 중 보이쾌속발효공법이 개발된 시기는 1975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1973년 곤명차창에서 개발됐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보이차쾌속발효공법이 1973년에 개발됐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誌>의 ‘보이차발효공법 및 설비개혁시험’에서다.

그러나 내용 중 “1973년부터 곤명차창은 쾌속발효공법을 개발하였으나 대체로 경험을 통한 생산방법으로 진행되었다. 과학적인 데이터의 부족은 결국 발효과정 중 찻잎 변화에 대한 관찰 및 찻잎 성분에 대한 변화를 파악하는데 미흡하였고 또한 획일적이지 못한 발효주기(醱酵週期)와 열악한 설비로 인해 보이차의 생산방식은 무척 낙후된 상태였다”라는 부연설명을 보아 소위 숙병(熟餠)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미생물발효보이차 즉 칠자병차의 상품화는 1975년 이후부터 시작된 일이라 볼 수 있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11 :보이차 속의 칠자병차 3

운남성 정부가 ‘운남성보이차제조공법시행규칙’을 1979년에 이르러 발표한 것을 보면 쾌속발효공법이 비록 1973년 곤명차창에서 개발됐으나 기술상의 제반 문제들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여러 해의 시험을 거쳐 비로소 정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보이차의 쾌속발효공법의 개발에 대한 일화는 수없이 회자되어 시중에 나돌고 있다. 사실 이러한 개발의 정확한 시기마저 불투명한 것도 사실이다.

일화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1973년(일설은 1974년),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의 부경리 송문경(宋文庚)과 오기부(敖其富)씨가 중국차무역박람회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전시장에서 얻은 광동지역에서 만든 지금과 같은 유사한 보이차 샘플을 가지고 당시 곤명차창(昆明茶廠) 공장장인 이희금(李希金)씨에게 보여줘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고 제안했다.

이 창장이 오계영(吳啓英, 2005년 작고)을 불러 샘플을 살펴본 결과 차의 외형이 튼실하고 색은 흑갈색이었으며 등급은 9~10급 정도의 쇄청모차로 만든 것 같았다. 당시 곤명차창에 마침 400톤 정도의 9~10급의 청모차(靑毛茶) 즉 쇄청모차가 창고에 쌓여있어 처리하는데 골칫거리였을 때였다. 이 원료는 청전, 즉 오늘날의 생전의 원료로 사용될 계획이었다. 창고 내에 있는 원료를 소화하는데 더할 나위가 없는 이 제의는 곤명차창으로 하여금 보이차의 미생물발효를 제작하는데 있어 시험용 원료로 삼도록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미생물공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그들은 보이차 샘플로 만든 것으로 되어 있는 발수차(發水茶)의 근거지인 광동지역에 맹해차창의 추병량(鄒炳良)과 동행하여 학습한 후 개발한 것이 열발효(熱醱酵)였다. 열발효란 쇄청모차 원료에 수증기를 가해 일정한 시간을 통해 산화시켜 모차의 외형을 흑갈색으로 만드는 공법을 말한다. 이 공법을 수차례 실습하여 개발한 것이 바로 쾌속발효인 미생물발효공법이다.

미생물발효의 보이차를 만드는 1차 공정은 녹차와 같다. 다만 사용하는 찻잎 원료는 대부분 함수량이 적은 쇤 찻잎이기에 먼저 10% 정도의 물을 뿌려 찻잎의 함수량을 높인 후 녹차와 같이 솥의 고온을 빌려 찻잎 속에 있는 효소 성분을 억제시켜 발효가 일어나지 않도록 살청(殺靑)이라는 공정을 한다. 이어 비비는 유념과정을 거쳐 세포조직을 약 15~30%를 파괴시키는 동시에 찻잎을 줄기 모양으로 만든다. 유념된 찻잎을 햇빛 아래에 건조해 함수량이 10%정도가 되도록 하는데 이렇게 1차적으로 만들어진 반제품의 차를 가리켜 모차(毛茶), 또는 쇄청모차라고 한다. 

 쇄청모차를 악퇴(渥堆, 미생물발효)의 공정을 거쳐 만든 것이 ‘쾌속발효보이차’다. ‘악퇴’ 공법이란 물과 습열 등의 작용으로 인해 생긴 미생물들이 촉매작용을 일으켜 찻잎속의 화학물질들로 하여금 산화, 분해 등의 일련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악퇴 또는 퇴적이라고 하는 과정은 주로 곰팡이에 의한 호기성(好氣性)발효로 이루어졌는데, 호기성발효란 미생물들이 산소를 좋아하여 공기 속에서 잘 자라는 성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보이차일 경우 다섯 검체에서 Aspergillus속 15종, Penicillium속 4종이 분리되는 것으로 보아 보이차의 주요한 미생물이 곰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40~60일 정도이면 발효의 공정을 마치며 완성한 잎차를 가리켜 보이산차라고 하나 상업적으로는 보이숙차라고 한다. 수증기를 통해 압제한 것을 긴압차(緊壓茶) 혹 압제차(壓制茶)라고 하며 학술적인 명칭은 긴압보이차라고 한다. 모양에 따라 둥근 것은 숙병(熟餠), 벽돌모양은 숙전, 그릇처럼 생긴 것은 숙타라고 한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13 : 보이차 속의 칠자병차
‘숫자보이차’의 어려움은 상품포장지 그 어느 곳에도 숫자에 관한 정보가 표기되어 있지 않는데 있다. 사실 숫자보이차의 탄생은 해외 시장인 홍콩을 겨냥한 상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이차의 포장은 357g×7편을 한 통에 담아, 12통을 대광주리에 담는 것이 전통포장법이다. 이때 상품의 출처를 알리는 전지를 만들어 대광주리에 한 장 넣은 것이 당시 유통의 관리 형태였다. 보이차 시장에서 이 전지를 가리켜 지비(支飛)라고 한다.

보이차의 지비 내용.


지비(支飛)에는 차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데, 상품명칭, 출고공장, 중량 특히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소위 칠자병차의 레시피 즉 7572, 7542 등과 같은 문구가 바로 이 ‘매두'란에 적혀있다. ‘매두’라는 단어는 중국의 표준어가 아닌 홍콩, 광동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외래어 즉 영어인 ‘Mark’의 홍콩식 표현이다. 지비에서 매두(Mark) 문자의 삽입은 칠자병차의 출생이 홍콩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였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처럼 칠자병차에 관한 정보는 결국 광주리를 통째로 구매하지 않는 한 개별포장으로 된 보이차의 포장지만으로는 그 어떠한 정보도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는 차에 관한 정보는 도매상들에게만 알려줄 뿐 소비자들은 상인들의 입에만 의지하는 이상한 유통구조로 변질되어 결국 ‘짝퉁 보이차’가 창궐하는데 일조하게 된 것이다.

보이차의 정보 부재는 소비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야기했다. 일부 보이차 애호가들, 특히 타이완의 마니아들이 칠자병차의 포장지들을 비교분석하는 작업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들은 수 십 종에 달하는 포장지의 재질, 인쇄명도, 글자의 차이점 등을 정리해 이를 토대로 소비자들에게 칠자병차의 진위에 관한 판별법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부분은 아래와 같다.

칠자병차의 포장지에는 둥근 원을 중심으로 상단에는 ‘운남칠자병차(雲南七子餠茶, 영어병기)’ 중앙에는 ‘팔중차(八中茶)’ 로고 그리고 하단에는 ‘중국토산축산진출구공사운남성차엽분공사(中國土産畜産進出口公司雲南省茶葉分公司, 영어병기)’ 등의 글자가 적혀 있다. 인쇄에서 판별할 수 있는 자료로는 상단 ‘운남칠자병차’에서의 ‘운(雲)’자와 ‘차(茶)’자의 상이점, 하단 ‘중국토산’부분에서 인쇄된 ‘중(中)’자의 크기 그리고 ‘팔중차’ 로고의 ‘차(茶)’자의 색상, 내비(內飛)에 인쇄된 ‘서쌍판납태족자치주맹해차창출품’라는 문구에서 ‘주(州)’자와 ‘출(出)’자의 차이점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내표(內票)의 대소(大小) 크기와 ‘인진배방(認眞配方)’라는 문구를 특별히 추가하여 편집한 내표 등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차성(茶聖)이라 불리는 육우(陸羽)는 <다경(茶經)>에서 이러한 말을 남겼다. “무릇 차의 좋고 나쁨은 오직 구전비결에 있다(茶之臧否存於口訣).” 그는 750년대에 “표피적이 아닌 차의 장ㆍ단점을 함께 논하고 감별할 수 있어야 진정한 차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이에 몇 가지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전문가 대접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구전비결에 따라 부단히 지식을 연마해야만 진정한 차 전문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라고 전한 바가 있다.

보이차의 지식과 정보를 공부하는데 있어 첩경 즉 지름길은 없다. 진정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부단히 보이차의 과학, 역사를 연마 그리고 연구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 말은 보이차의 진위 판별법에 있어 포장지에서 나타난 여러 사안들은 결국 곁가지에 불과한 참고사항이라는 뜻이다. 육우의 일침은 오늘날의 보이차에도 유효하며 보이차 애호가들에게 많은 것을 사색케 하는 대목이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15 : 현대 보이차의 정의
보이차의 명성이 1990년대 해외에서 떠오르자 생산지인 중국 운남에서도 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참여 아래 학자들이 움직였고 보이차의 역사, 과학들이 속속 밝혀진 것이 20세기 말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 ‘짝퉁 보이차’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보이차의 명칭에 대한 왜곡 또는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2002중국보이차국제학술연토회’에서 각국 차전문가들이 모여 “보이차는 세 가지 선결 조건들이 뒤따라야만 ‘보이차’라 부를 수가 있다”는 결론을 지었다. 즉 보이차에 관한 지역, 원료 그리고 가공법에 관한 정의다.
1) 운남지역(雲南地域)
보이차의 찻잎 원료는 반드시 운남지역에서 생산된 것이어야만 한다. 보이차의 주요 산지는 오늘날 서쌍판납(西雙版納)과 사모지구(思茅地區)에 있으며 특히 란창강(瀾滄江) 유역이 그 중심지이다. 서쌍판납의 차밭은 란창강(瀾滄江) 양쪽의 고산구릉(高山丘陵)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적 요소들은 찻잎 속의 화학물질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는 보이차의 역사과 정통의 맥이 바로 운남지역에서 비롯되는 것을 시사한다.

란창강 유역의 대엽종 찻잎.



2) 운남대엽종(雲南大葉種)
운남차과학연구소(雲南茶科學硏究所)에서 운남대엽종과 소엽종의 내용물의 함량에 대해 비교 측정한 자료에 의하면 대엽종에서의 차침출물(茶浸出物)은 소엽종보다 3%가 높으며, 특히 폴리페놀(Polyphenol)은 소엽종보다 5~7%, 카테킨(catechins)의 측정은 소엽종보다 30~60% 높게 나타났다. 이는 곧 대엽종으로 만든 보이차가 오래 묵으면 묵을수록 묵은 향기가 배어날 수 있는 원인으로 규명되었다.


3)쇄청모차
보이차의 1차 공정은 녹차와 같다. 단 건조방법은 일광건조를 통해 말린 쇄청차이어야 한다. 보이차의 원료인 쇄청모차는 다른 녹차와는 달리 함수량이 일반표준보다 높아 약 9~12%에 달한다. 쇄청모차는 장시간의 햇볕을 이용한 건조로 인해 녹차의 클로로필(엽록소) 성분 중의 마그네슘 이온이 떨어져 페오피틴으로 변하게 되어 엽색이 어두워지기도 한다. 또한 10% 이상의 높은 함수량은 산화 효소들이 작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결과가 초래되어 보이차의 후발효(後醱酵) 중 성분변화가 일어나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이는 곧 찻잎이 산화되지 않도록 단시간 내에 건조품으로 만들어낸 초청법(炒靑法)이나 홍청법(烘靑法)에서 얻어질 수 없는 효과이기에 보이차의 건조는 필히 햇볕을 통해야만 진정한 보이차 맛을 얻을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쇄청차는 엄밀히 말해 다른 녹차와는 달리 찻잎의 상당부분이 산화되어 있는 녹차이다. 물론 쇄청모차는 직접 우려 마실 수도 있으나, 녹차로서의 상품가치가 별로 없기에 주로 정제 후 재가공하여 1차적으로 미생물을 통해 만든 숙차(熟茶)를 만들거나 혹은 재차 압제하여 숙병(熟餠)으로 만들다. 또는 쇄청차를 원료로 하여 곧 바로 긴압차인 청병(靑餠)을 만들어 저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결론은 소엽종 찻잎 원료로는 보이차를 만들 수 없으며, 운남 이외 지역의 찻잎으로 만든 보이차는 역시 ‘짝퉁 보이차’로 분류되는 것이다. 특히 건조부분에 있어 햇볕 아닌 방법으로 찻잎을 건조할 경우 보이차의 후발효 작용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구결과가 있다. 이에 보이차의 건조는 필히 햇볕을 통해야만 훗날 바른 보이차의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16. 정보화 사회의 허식 ①
맹해 교목형 차나무.
디지털 혁명으로 시작되는 21세기를 가리켜 ‘지식 정보화 사회’라고 한다. 세계는 정보중심 세계로 발돋움하고 있으며 가정과 직장에서는 인터넷을 이용해 손쉽게 지식을 접하는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인터넷 정보의 확산은 접근성이 쉬워졌다는 순기능과 함게, 난무하는 악식(惡識)과 허식(虛識)이라는 역기능도 가지고 있다.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보이차에 관한 지식을 예로 들어보자. 당신은 보이차에 대해 어떤 정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가? 그 정보는 어느 정도 믿을만하며 깊이가 있는가? 이치에 맞지 않는 궤변을 정보라 믿고 자신의 판단을 위태롭게 만든다면, 아무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2002년에 제정된 보이차의 정의에 대한 키워드는 산지, 원료, 가공법이다. 산지에 대해 누군가가 “운남 대엽종 종자를 아프리카나 미주에서 재배한다면 그것은 보이차가 아니란 말인가?”되묻곤 한다. 이에 대해 필자의 답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왜 안 된다는 것인지를 과학적으로 풀어보도록 하겠다.

운남 지역은 차나무의 원산지로 지금도 야생 차나무들이 즐비하게 있는 곳이다. 이곳은 빙하기일 때도 생태계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을 정도도 야생식물들이 원시상태로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구상에서 우리가 보이는 차나무의 형태는 교목형, 반교목 그리고 관목형으로 나뉘어져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종류의 차나무들을 별개로 생각하고 있으나 연구에 따르면 교목형이든 관목형이든 차나무의 세포 속에는 모두 30개의 염색체가 있다. 이는 곧 두 가지 형태의 차나무일지라도 하나의 종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에 학문적으로 차나무 형태 중 교목은 원시형, 관목은 진화형, 반교목은 과도형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관목형 차나무들은 모두 교목형에서부터 진화된 차나무라는 것이다.

위도가 낮은 남쪽 열대지방에서는 잎으로 전달된 아미노산 성분이 떫은맛을 내는 폴리페놀로 전환되기 때문에, 감칠맛이 부족하고 떫은맛이 강하다. 이러한 원료로 녹차를 만들 경우 품질이 떨어지기에 발효차를 만드는 것이 적합하다. 이와 반대로 온도가 낮은 북쪽 한랭지역의 차나무는 질소화합물의 합성과 축적작용이 유리하기에 아미노산, 카페인등 질소함유물질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이에 차나무의 뿌리에서 흡수된 아미노산 성분이 줄기를 통해 잎에서 분해되지 않고 축적되어 차의 맛 중 감칠맛이 많아져 녹차를 만드는데 적합하다.

연구에 따르면 같은 품종의 차나무일지라도 위도에 따라 화학성분의 함량도 차이가 난다. 이런 시험이 행해진 적이 있다. 운남성 맹해에서 자란 저엽종을 절강성 항주에 심었더니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동사(凍死)했다. 그러나 주위의 사천(四川)지역에서 일정 기간 심어 추위에 대한 내성을 기른 후 다시 항주에 옮겨 심었더니 동사되지는 않았으나 나무와 잎들이 왜소화(矮小化)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같은 뿌리의 차나무에서 자란 찻잎일지라도 맹해와 항주에서 자란 찻잎의 성분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위도가 낮은 남쪽 맹해의 찻잎에서는 폴리페놀, 카테킨 등 내용물들이 항주에 비해 월등이 높았고, 이와 반대로 아미노산과 카페인 등 질소화합물들의 함유량은 항주의 찻잎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는 보이차의 원료로는 맹해의 찻잎이 적합한 반면 항주의 찻잎은 녹차를 만드는데 적합하다는 과학적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이 왜 같은 차나무일지라도 다른 지역에서 자란 찻잎으로 보이차를 만들 수 없다고 하는지에 대한 이유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17 : 청병은 녹차인가?
햇볕에 말리는 쇄청모차.
필자가 다니던 학교의 커리큘럼을 보면 보이차에 관한 수업은 3%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중국차는 보이차에 관한 것 일색이다. 지식은 양식(良識), 곧 좋은 지식과 나쁜 지식인 악식(惡識) 그리고 좋은 지식처럼 위장하는 허식(虛識)으로 나눠진다. 보이차는 어려운 학문이다. 특히 오늘날 정보사회에서 넘치고 있는 보이차에 관한 악식과 허식들이 보이차를 이해하는데 일정한 장애로 작동하고 있기에 보이차에 관한 지식은 더욱 혼돈한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21세기 초 전통가공법으로 만든 보이청병의 재등장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학문적으로 청병을 녹차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병은 녹차인가? 이에 대한 이해의 키워드는 살청(殺靑), 쇄청, 발효(醱酵)라는 용어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누군가 보이차의 산지, 원료, 가공 등 3가지의 정의 중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가를 물어본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가공법인 ‘쇄청법’을 꼽을 것이다. 살청과 쇄청은 모두 차의 가공법의 하나이나 별개의 가공과정에서 이루어진 각기 다른 공정이다.

녹차로 예를 든다면, 첫 번째 덖음 즉 고온을 통해 찻잎 속에 산화효소의 활성을 파괴하여 발효를 억제하는 공정을 ‘살청’이라 한다. 그리고 살청 덖음 후의 건조방법 중에서 찻잎을 솥으로 건조시킨 것을 ‘초청(炒靑)’, 건조기계를 통해 말린 것을 ‘홍청(烘靑)’, 햇볕을 통해 건조한 것을 ‘쇄청’이라 한다. ''쇄''는 햇볕에 쬐어 말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학문적으로 차의 초기가공에서 생산된 반제품을 가리켜 모차(毛茶)라고 한다. 이는 곧 한국에서 말하는 초벌차이기도 하다. 녹차계열에 속해있는 보이차의 초벌차가 햇볕을 통해 말렸기에 녹차건조법의 용어인 ‘쇄청모차’를 쓴다. 그렇다면 보이숙차가 후발효차(後醱酵茶)라면 보이생차 즉 청병은 녹차인가? 이에에 대한 필자의 답은 아니다 쪽에 서있다.

이러한 학문과 배치되는 대답의 근저에는 지속적으로 개발된 신차(新茶)의 등장요인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차에 관한 현대용어는 20세기 초반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용어들이 새로이 만들어지고 또한 사라지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 용어들은 그 개념이 시대에 따라 변천 ㆍ확장되어 전혀 다른 개념으로 새로이 탄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보이차가 등장함으로써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학문적으로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용어들이 상당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쇄청’과 ‘발효’에 관한 용어다.

오늘날 차의 용어개념에 관한 정의는 60년대 중국 제차학(製茶學)의 최고 권위자였던 안회농업대학(安徽農業大學) 차학과(茶學科) 故 첸촨(陳椽) 교수에 의해 최초로 정립됐다. 그의 학문적 논거에 따라 제작된 <제차학(製茶學)> 교과서에서는 쇄청 건조법을 녹차의 가공법으로 귀속하고 있으며, 이 교과서에서는 ‘햇볕을 통해 말린 쇄청모차는 모두 악퇴(渥堆)라는 공법을 거쳐 만든 후발효차인 흑차(黑茶)의 원료로 쓰이고 있다’는 정의를 두고 있다.
그 동안 쇄청녹차는 녹차의 일종임에도 불구하고 상품으로서 시장에서 거의 유통되지 못하고 대체로 반제품인 모차 즉 초벌차인 상태로 거래되고 있는 것은, 쇄청녹차의 대부분이 흑차의 원료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다음 호에 계속)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18 정보화사회의 허식③
일반인들이 가장 많은 혼란을 느끼는 용어가 바로 ‘살청(殺靑)’이라는 것이다.
차나무의 신선한 찻잎을 가리켜 선엽(鮮葉)이라고 한다. 찻잎을 차나무에서 채취하는 순간 선엽은 산화효소에 의해 산화되기 시작한다. 산화효소의 활성을 잃게 하는 동시에 산화의 진행을 정지시킬 수 있는 방법은 가공을 통해 단시간 내에 선엽의 온도를 80℃ 이상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이 작업을 학문적으로 ‘살청’이라고 한다.

녹차를 처음 덖을 때 즉 1차 덖음에서 왜 솥의 온도가 뜨거워야 하는 지에 대한 해답을 바로 살청이라는 화학반응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선엽의 산화효소는 열에 의해 일으키는 변성온도(變性溫度)가 80℃다. 이는 곧 ‘살청’을 하는데 있어 선엽의 온도 즉 엽온(葉溫)을 최저 80℃ 이상으로 잡아야만 단시간 내에 산화효소의 활성을 잃게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제대로 된 살청은 한번이면 그 효과를 이루어낼 수 있다. 녹차의 살청은 최초의 덖음 즉 고온을 통한 첫 번째 덖음이 살청공정이며 이후 행하는 저온을 통한 덖음은 횟수와 관계없이 모두 건조공정에 해당된다.

차의 분류에 있어 살청의 유무 또는 살청을 언제 하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발효(산화)를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 첫 번째 가공공정을 살청으로 택한 것이 녹차며 이를 비발효차(非醱酵茶)라고 한다. 반발효차(半醱酵茶)로 불리는 오룡차는 일정한 발효를 거친 선엽을 살청공정을 가해 산화를 중지시켜 만든 차를 말하며, 우리가 흔히 보는 15%~60%이라는 숫자의 의미가 바로 선엽을 몇 퍼센트의 발효상태에서 살청을 했느냐를 알려주는 것이다. 오룡차 중의 경발효차(輕醱酵茶), 중발효차(中醱酵茶), 중발효차(重醱酵茶)라는 용어가 바로 이러한 논거에 따라 붙여진 용어다. 완전한 발효를 통해 맛을 내는 홍차는 산화효소의 도움이 절대적이기에 살청공정을 행하지 않으며, 때문에 홍차를 완전발효차라고 한다.

그럼 선엽의 산화효소를 중지시키는 살청공정에는 몇 가지 방식이 있을까? 대체로 살청의 방식은 덖어서 하는 것과 증기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증기를 통한 살청방식은 주로 녹차에 적용되는 반면 덖음 방식의 살청은 모든 종류의 차에 이용되고 있다. 덖음 방식의 살청에는 솥에서 덖는 수제식과 로울링 방식인 기계식이 있다.

살청을 증기방식을 통해 만든 녹차를 증청녹차(蒸靑綠茶)라고 부르는 반면 살청을 덖음 방식을 통해 만든 녹차는 건조방법에 따라 이름 또한 달리한다. 예를 들어 살청과 건조의 공정을 모두 솥에서 행한 것은 ‘초청녹차(炒靑綠茶)’라 하며, 건조공정만을 기계를 통해 말린 것을 ‘홍청녹차(烘靑綠茶)’ 그리고 햇볕을 통해 건조한 것을 ‘쇄청녹차(쇄靑綠茶)’라고 부른다.

필자가 강의를 통해 이러한 질문을 여러 번한 적이 있다. “녹차의 가공법에서 살청은 몇 차례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대체로 3번 혹은 4번 또는 9번이라는 답들이 많았다. 9번이란 답은 아마 구증구포(九蒸九曝)라는 녹차가공법에서 비롯된 발상일 것이다.

차의 가공법에서 살청의 공정은 단 한번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답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이에 대한 원인은 우리말의 가공용어에서 그 해답을 찾아 볼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녹차를 덖음차 또는 볶음차라고 한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살청과 덖음을 같은 공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녹차를 3번 덖었다는 것을 살청을 3번 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얘기다.

“보이차는 살청을 한 번하고 우리의 작설차는 구증구포로 하니 작설이 보이차보다 좋다”는 말이 인터넷에서 정보로 떠돌고 있다. 보이차와 작설차의 우열을 덖음의 회수로 단순 비교하는 잣대는 살청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허식(虛識)이다. 이러한 정보의 오류는 보이차에 대한 지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짱유화교수의 보이차이야기]19. 정보화 사회의 허식④ / 홍청녹차가 보이차일 수 없는 까닭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20 : 보이차의 발효


청병의 자연발효.
보이차를 이야기할 때 흔히 듣는 용어가 미생물발효와 자연발효다. 미생물발효와 자연발효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보이차라는 상품이 학문의 영역에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차의 발효’에 관한 정의는 미생물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차의 과학 즉 차의 제조법에서 말하는 ‘발효’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미생물에 의한 발효가 아니라, 찻잎 속에 함유된 주성분인 폴리페놀(Tea polyphenols)이 폴리페놀옥시다젠(Polyphenoloxidase)이란 산화효소에 의해 산화되어 황색을 나타내는 데아플라빈(Theaflavin)과 적색의 데아루비긴(Thearubigin) 등으로 변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성분의 복합적인 변화에 의해 독특한 향기와 맛, 수색(水色)을 나타내는 작용을 말한다. 즉 찻잎을 가공할 때 카테킨을 위시한 여러 종류의 화학성분의 산화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그동안 차류(茶類)의 영역 밖에서 별로 취급받지 못한 차, 혹은 새로이 발견되어 연구 대상으로 오르는 차들의 발효에 미생물이 관여하는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이것을 기존의 제조법에서 말하는 발효와 구별할 필요가 있어 이를 ‘미생물발효차’라 명명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보이차다.
문제는 보이차 시장에서 청병과 숙병이라는 두 가지 상품을 우리가 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발효에 대한 이해부족의 상태에서 보이차를 접근하다보니 자연히 미생물발효와 자연발효의 의미를 헷갈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미생물이란 눈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미세한 생물의 총칭으로 세균, 곰팡이, 효모, 남조류, 바이러스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지구상에 미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고 할 만큼 미생물은 자연계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찻잎은 차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미생물로부터 오염되는 것이 보통이며, 고온을 통한 살청공정에서 대부분 소멸되나 비비기의 유념공정에서 또 다시 오염되는 것이 미생물의 실체다. 이후 여러 차례의 열처리 공정을 거쳐 찻잎이 완전히 건조되었을 때 비로소 대부분의 미생물들이 찻잎에서 사라진다. 이는 곧 어느 차류의 가공이든 미생물의 관여가 불가피하며, 그 관여의 정도가 주류가 아닐 경우 우리는 이를 ‘미생물발효’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차의 과학이다.

이와 반대로 숙병보이차의 발효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미생물을 대량 키워 차의 산화를 가속화시키는 방법이므로, 차의 가공과정에서 주된 역할이 미생물이었기에 이를 ‘미생물발효’라고 한다.
그렇다면 차의 미생물발효 과정 중에는 자연발효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가? ‘자연발효’란 산화효소가 전혀 참여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직 산소를 통해 이루어진 차의 산화를 말한다. 공기 중에는 늘 20% 가량의 산소가 존재한다. 산소는 다른 원소와 친화력이 강하여, 비활성기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원소와 반응을 일으켜 산화물을 만든다. 차의 화학물질 중 폴리페놀, 아스코르빈산(비타민C), 알데히드, 케톤, 유지질 등 화학물들이 모두 산소를 통해 자연 산화될 수가 있다. 물론 온도, 습도, 광선, 산소 등 산화인자의 폭에 따라 자연산화의 진행도 정비례로 빠를 수가 있다.

정상적인 차의 가공에서 미생물이 참여할 수 있듯이 미생물발효 공정에서도 산소가 참여할 수가 있다. 미생물발효와 자연발효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로, 차의 발효에서 누가 가공공정의 주체이냐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산화효소로 인한 발효와 산소를 통한 발효가 함께 진행되는 것도 ‘보이차의 발효과학’이며, 이러한 발효이론의 연장선에서 청병과 숙병을 논해야 비로소 보이차 발효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21 : 보이차의 올바른 저장법


보이차를 저장하는 모습.
예로부터 차는 햇차일수록 귀하게 여겼다. 차의 변질 인자는 산소ㆍ온도ㆍ습도ㆍ광선이며 여기에 산화효소의 작용, 미생물의 참여 그리고 자연산화의 진행 등 제반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차의 변질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차의 함수율을 6% 이내로 유지하고, 포장지의 빛 차단과 진공을 통한 포장 그리고 저온의 저장 방법 등은 모두 차의 산화를 막기 위한 조치다.

20세기말, 차의 저장법에 대한 인식을 뒤엎는 사건이 일어났다. 즉 어떻게 해야 신선도를 유지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묵혀야 제대로 된 차맛을 느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저장법이 등장한 것이다. 저장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던 저장에 대한 개념에 정반대되는 저장 개념의 탄생은 많은 혼란을 초래했고, 그 혼란의 중심에 보이차가 서 있다. 녹차의 질은 어떻게 산화인자들로부터 철저히 차단하느냐가 관건이라면 보이차는 이와 반대로 어떻게 이러한 인자들을 충분히 활용하느냐에 따라 품질을 다르게 만들 수가 있다.

그렇다면 보이차는 어떠한 방법으로 저장해야 제 맛이 날까? 먼저 차의 산화인자와 보이차의 함수관계 그리고 산화여건을 알아야 보이차 맛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

보이차의 산화인자 중 가장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차의 함수율이다. 함수율의 증감은 공기의 습도에 따라 결정이 되는데, 상대습도가 50%가 넘으면 보이차는 빠르게 수분을 흡수하게 된다. 물론 습도의 증가비율이 높을수록 함수율도 정비례해 높아진다. 그렇다고 보이차의 함수율이 마냥 높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대체로 함수율이 12% 이상 넘으면 보이차에 빠른 속도로 곰팡이가 피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 온도마저 높아지면 그 부패의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온도와 습도의 적절한 배합은 보이차의 맛을 내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된다. 예를 들어 환경의 온도와 습도가 모두 높아지면 보이차에 곰팡이가 피어 곧 바로 부패하게 된다. 그러나 온도만 높고 습도가 모자라면 유리지방산이 증가해 보이차에서 신맛이 나게 된다. 그리고 보이차를 직사광선에 노출하게 되면 산화의 속도는 빠르게 진행되나 발효된 후의 보이차의 맛은 밋밋하게 변해버려 가치를 잃게 된다.

저장환경에서의 산소공급은 보이차의 맛을 내는데 필수조건이다. 흔히 보이차의 저장용기에 덮개를 덮어 산소의 유통을 차단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산소의 공급은 많을수록 좋다. 통풍이 잘 되고 서늘한 곳에 보이차를 저장하라는 얘기는 곧 산소를 충분하게 공급하라는 뜻이다. 전통 보이차의 압착에서 보이는 느슨한 누름도 산소의 공급을 높이기 위한 배려이다.

보이차의 참맛은 저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무리 좋은 원료라도 옳지 않은 저장방법을 사용한다면 결국 보이차의 진미(眞味)를 잃게 되며 품질이 저하된다. 풍부한 산소에 서늘한 곳, 실온을 25℃에 맞추고 상대습도를 70%로 유지하게하면 보이차의 저장환경은 더 없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산화조건들은 하여금 보이차의 산화효소반응을 일으키고, 적당한 미생물의 참여를 유도하며, 자연산화의 진행을 원활하게 작용하여 보이차의 숙성 즉 후발효의 가치를 한층 높일 것이다.

이러한 산화인자들을 철저히 예방해야만 차의 변질을 막을 수 있다. 물론 보이차의 맛은 여기에 더해 산화효소의 작용, 미생물의 참여 그리고 자연산화의 진행 등 제반 요소들이 함께 아우러진 결과물이기도 하다.

짱유화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마지막회


보이차의 복성이라 일컬어지는 중국 썬페이핑(沈培平) 사모시(思茅市) 시장.
우리가 보이차를 기억하는 열쇠는 여러 가지다. 그만큼 ‘이야기 자산’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누군가 ‘보이차는 이야기로 마시는 차’라 했다. 처음엔 중후한 찻빛에 마음이 끌리고 다음으로는 찻잔을 돌려 취하는 보이차의 향, 머금었을 때 입안을 조이는 천(千)의 맛 그리고 목젖을 타고 넘는 저릿한 촉감 등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이야기하며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다가온다. 이렇듯 보이차는 어떤 차보다 ‘분위기’를 많이 타는 차다.

보이차의 분위기는 와인과 많이 닮아 있다. 와인은 술이기 전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비즈니스에서 협상을 좀 더 부드럽게 진행시켜주는 훌륭한 매개체다. 보이차도 와인만큼이나 비즈니스의 중요한 문화적 매개체이자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만드는 과정을 보면 산지와 품종, 찻잎의 수학, 원료의 고르기 등 조건들이 와인과 별반차이가 없다. 저장과정을 보면 발효에서 숙성까지 와인과 쌍둥이처럼 쏙 빼닮았다. 와인 병을 잘 보관하면 숙성이 잘 되어 맛이 더욱 좋듯 보이차도 어떻게 보관하느냐에 따라 향과 맛이 더 개선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차는 와인과 전혀 다른 상품으로 취급받고 있다. 쉽게 말해 와인은 가격만 있지만 보이차는 가격과 함께 ‘짝퉁’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와인의 모든 정보는 라벨에서 제공된다. 로고, 빈티지, 상표, 등급 그리고 병 입지와 로트번호 등 모든 정보를 상세히 표기해 소비자들에게 제공한다.

물론 보이차에도 라벨이 있다. 포장지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글귀를 믿지 않는다.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달리 쓰여 지는 것이 보이차의 라벨문구다. 야생, 교목, 노차수(老茶樹) 등 원료의 선택부터 이무(易武), 반장(班章) 등 산지의 출신까지, 정보가 아닌 거짓 글귀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보이차의 현주소다. 그 결과 보이차는 지금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아무도 믿지 않는 활자는 죽은 글씨에 불과하다.

죽어가는 보이차 시장을 살리고자 헌신적으로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다. 바로 썬패이핑(沈培平) 사모시(思茅市) 시장이다. 정부 관료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차의 신뢰문제와 경제적 지위향상 그리고 차농(茶農)문제 해결에 밤낮으로 헌신적 봉사를 하고 있다. 그는 보이차가 안고 있는 문제를 풀기위해 지금도 보이차 삼매경에 빠져있다. 그는 “보이차의 발전과 신뢰는 정보의 투명화에 달려있고, 이러한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예산확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정부의 몫이 크다. 임기 동안 이를 차질 없이 실행에 옮겨 보이차를 와인과 같은 개런티를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갈 것이다”고 다짐한다. 지금 보이차계에서 그를 ‘보이차의 복성(福星)’이라 칭송하고 있다. 나는 믿는다. 보이차의 복성이 많이 나올수록 보이차는 와인과 더불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서 있는 현재를 창조하고 미래를 기획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연재를 시작하며’를 쓴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다. 아직도 많은 이야기거리가 남아 있는데 마침표를 찍어야하니 왠지 마음 한구석에 미련이 남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한 평생을 푼다 해도 완벽하게 이야기하지 못할 차가 보이차며, 아무리 써도 메마르지 않는 이야기가 보이차 이야기다.
그래도 아쉬움이 있다면 많은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옛 보이차 상품들을 집중조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한된 지면에서 그림을 통해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보이차를 어떠한 기준으로 선택하여야 옳은가’에 중심을 두어 글을 썼던 것이 원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미흡하고 부족했던 글을 끝까지 읽어주고 격려와 질책을 함께 보내주신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리면서 펜을 거두고자 한다.